본문 바로가기
세계속의 한국

그리스 슈퍼에서 뜬금없이 “한국을..”고백을 받다.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4. 5. 7.

 


 



오늘 오전 업무를 마친 후, 빨리 장을 봐서 요리를 하려고 자주 들르는 슈퍼마켓에 갔습니다.

어쩌다 보니 마트가 붐비는 시간이 아닌 좀 한가한 시간에 들르게 되었고, 계산대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서 저는 좀 여유 있는 걸음으로 필요한 물건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게를 재서 가격표를 붙여주는 야채코너 직원에게 토마토를 담은 봉지를 건넨 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직원을 사이에 두고 6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토마토 봉지를 직원에게 다시 건네 받으면서 '내가 동양인이라 이상해서 쳐다보나?' 싶어 얼른 자리를 뜨려는데, 아저씨는 입술을 달싹이며 제게 뭔가 말을 건넸습니다.


"...&%*$%&*z*&^%$...."

'지금 이 아저씨가 뭐라고 하시는 거야?? 지금 저게 어느 나라 말인 거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을 건넨 후 제 대답을 기다리는 아저씨에게, 저는 당황해서 

"오리스떼?Ορίστε;(실례지만 뭐라고요?)" 라고 그리스어로 되물을 수 밖에 없었는데요.

 

아저씨는 제 대답에 놀란 듯, 다시 그리스어로

"아! 그리스어를 할 줄 아는군요. 어디서 왔어요? 아가씨? 러시아인 아니에요? 난 아가씨가 러시아인인 것 같아서 러시아어로 말했는데? " 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아가씨는 진짜 제가 아가씨 같아서가 아니라, 원래 그리스인들은 아주 할머니가 아닌 여성에게는 아가씨라는 호칭을 흔히 사용합니다. 아가씨란 호칭이 듣고 싶으신 40대 50대 여성분들은 그리스로 놀러 오세요^^)


"아…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한국 사람입니다."


중국인,일본인으로나 다른 동남아시아인으로 오해를 받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가끔 쌍꺼풀도 없는 제게 러시아 사람이냐고 묻는 그리스인들을 만날 때면 저는 몹시 당황스러운데도 불구하고 그리스에서만 세 번째 이런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마 러시아가 아닌 중앙아시아 국가 중 나 같은 외모를 가진 민족이 있는 모양이야. 왜 자꾸 러시아인이냐고 하지.. 이 참에 러시아어를 진짜 공부해야 하는 건가??' 

라는 생각을 짧은 찰라 하고 있는데, 아저씨는 제게 뜬금없는 고백을 해왔습니다. 


"아!!! 꼬레아!(Κορέα한국) 내가 사랑하는 나라! 한국~!

아가씨, 난 터키사람이에요! 그리스에 산지 오래되었지만, 터키인이랍니다. 

우리가 얼마나 한국과 한국사람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나요? 

난 한국만 생각하면 막 가슴이 뛰어요!"

 

그리스인인 줄 알았던 낯 모를 터키인 아저씨의 "한국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그것도 슈퍼마켓에 장 보러 왔다가 갑자기 듣게 되니, 저는 좋다는 생각이 채 들기 전에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는데요.

 

"아...그러세요? 감사합니다. 한국을 그렇게 좋아해 주시니 기쁘네요." 라고 간신히 대답을 하고, 뭔가 할 말이 더 남은 듯한 낯선 아저씨를 뒤로 한 채 얼른 다른 코너로 이동했습니다.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가는 제게 포옹이라도 할 자세로 두 팔을 벌린 상태로, 아저씨는 감격스런 표정을 지으며 제 옆에 바짝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내가 한국인이라고 답했는데도, 세월호 이야길 묻지 않아줘서 감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만해도 사무실에서 손님들에게만 세 번이나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구차한 변명을 해야 했기 때문에입니다.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요트 금고를 고치러 온 관광객에게까지 구차한 변명들을 늘어 놓으며 기분이 몹시 가라앉았었습니다.

제가 구차한 변명 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그리스인을 비롯해 유럽인들이 세월호에 대해 묻는 질문은 한국인들이 예상하는 질문과는 좀 다른 경우가 많아서 참사 자체의 문제점에 대해 묻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이란 나라의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지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속터지는 질문에 답변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왜 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킨다고 그 말을 듣고 안쪽에 있었을까? 원래 평소에 해상 안전 수칙에 대해 배운 대로 행동하지 않았을까??" 라든가 "왜 선장은 그 나이에 연금으로 편하게 살지, 은퇴 후에도 일을 해서(나이만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을까?" 

등의 유럽식 사고방식의 질문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올 때이 질문들이 한심해서 피가 꺼꾸로 솟듯 화가 나지만, 무지에서 온 질문이기에 저는 또 

"한국은 아직 은퇴나 연금 제도가 유럽만큼 자리 잡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정년이 된 그 날, 일을 무조건 그만두고 축제 분위기로 은퇴하는 유럽처럼,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한국 아이들은 평소에 어른에게 대들지 않고 그 말에 순종하는 것이 예의라고 배우기 때문에...그리고 평소에 해상 안전 수칙에 대해 배우지 못 했기 때문에... " 

라고 구차하고 구차하게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희생된 애들이 한없이 가엽고 국가 위기 대응 체계가 주먹구구인 것에 속이 휙 뒤집히는데, 

외국인들이 해온 질문이다보니, 내 나라를 외국인 앞에서 욕을 할 수는 없어서 되도록 한국에 대해 감싸며 이런 설명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 괴로울 때가 정말 많아서, 제발 제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으면 싶은 요즘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터키 아저씨를 뒤로하고 빠르게 옆의 치즈 칸으로 이동했을 때였습니다.

터키 아저씨와 비슷한 연배의 다른 아저씨가 제게 다가왔고, 역시 알 수 없는 언어로 제게 말을 거는 게 아니겠어요?!

'오늘 참 이상한 날이다… 원래 그리스에는 은퇴 후에 한가해서 수다떨기 좋아하는 아저씨들이 참 많지만,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다…' 이러면서도

얼른 "저, 한국 사람입니다." 라고 그리스어로 대답을 했는데요.

 

아 글쎄, 이 아저씨도 "아! 난 터키사람이에요! 난 한국을 정말 사랑해요!!!!" 라는 게 아니겠어요???!!!!

 

그리스에 이민 와서 한국을 사랑한다는 말을 외국인으로부터 들은 것은 한국어를 배우는 제자들 이후로 처음이었는데, 그것도 한 슈퍼마켓에서 두 명에게나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좀 이상했습니다.


저는 손에 든 장바구니를 내려 놓고, 아저씨에게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저 쪽에 있는 아저씨와 친구세요?"

아저씨는 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힐끗 보더니, "아! 맞아요! 나랑 같이 온 친구에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번엔 다른 것을 물었습니다.

"왜 한국이 그렇게 좋으세요? 정말 궁금해서 여쭤 봅니다..."


저는 흔히 한국인들이 터키에 대해 이야기하는 '역사 속에서 서로 도우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온 형제의 나라' 라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아저씨의 회색 빛이 도는 푸른 눈을 가만히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터키인 아저씨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 베트남에 산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오. 그 친구가 얼마나 사람이 좋던지 지금도 자주 생각나곤 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네요. 

 아! 그리고 며칠 전에 저기 저 친구와 함께 한국 영화를 봤는데, 정말 어찌나 영화를 잘 만들었던지 아주 반했다니까. 그 제목이 뭐였더라...스노우 뭔데... 열차에 사람들이 타고 있는 이야기.."


"설국열차요?"


"아! 그래! 그거! 정말 재미있게 봤거든. 다른 친구가 줘서 본 영화였는데, 역시 한국이야! 이러니 어떻게 한국을 안 사랑할 수가 있겠어! 난 한국을 정말 사랑해!"

그 말을 하던 아저씨는 갑자기 추억에 잠긴 듯 허공을 잠시 응시하다가 이내 제게 급히 인사를 건네고 저쪽에 서 있는 아저씨를 막 부르며 뭔가 이야기를 하며 뛰어가버렸습니다.

 

그 두 아저씨가 신나게 뭔가 이야기 하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계산을 하고 마트를 나와 주차장으로 걸어오는데, 자꾸만 아저씨의 말과 눈빛이 떠올랐습니다.

평소 그리스인 눈치를 많이 보는 '터키인 이민자'여서인지, 제게 결혼했냐고 물었을 때 제가 그리스인과 결혼했다고 대답하자 "그리스인과 결혼한 건 정말 잘 한 일이에요!" 라며 금새 터키인 이민자 특유의 그리스인을 추켜세우는 듯한 말투와 태도를(그리스인들이 싫어하는 터키인으로서 그리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취했던 것도 자꾸만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아저씨가 만났다는 좋은 한국인재미있게 본 한국 영화 때문이라니, 제가 국제 사회에서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요즘 같은 때에, '한국을 좋아해' 정도가 아닌 "난 한국을 정말 사랑해!" 라는 말을 외국인으로부터 듣게 된 것은,

해외에 사는 저로서는 "난 너를 사랑해." 라는 고백을 듣는 것보다 더 감격스럽고 위로가 되는 말이었습니다.

비록 슈퍼마켓에서 장 보다가 갑자기 듣게 된, 뜬금없는 고백이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는 또 이렇게 한국을 응원하고 사랑해주네요.

그러니 힘 내시는 하루 되세요!

 


 

관련글

2013/08/07 - 그리스에서 마음이 답답할 때 찾는 아주 특별한 슈퍼마켓

2013/10/29 - 그리스 여성들이 집밥을 사수하는 방법

2014/01/15 - 이민 초기 나를 울고 웃긴 그리스 카레

2013/02/27 - 군복무 중, 영국 윌리엄 왕자를 만났던 그리스인 남편이야기.

2013/05/09 - 그리스에서는 부자가 아니어도 배, 요트를 가질 수 있다니!

2013/12/06 - 우리는 한국을 그리워하는 식구다.

2014/03/19 - 날 좀 당황시킨 그리스인 아기의 솔직 반응

2013/11/08 - 이민 초기엔 안타깝게도 헷갈리는 친구의 기준



 

  2014년 6월30일자로 Daum View 제도가 문을 닫는다고 하네요.

 그간 View 를  통해 정기 구독해오셨던 분들은, 번거로우시더라도 

 제 블로그 주소 http://greekolivetree.eu 메인 페이지로 들어오셔서

 (혹은 지금 블로그 오른쪽 상단 '홈' 을 누르셔도 됩니다.)

 주소를 '즐겨찾기' 에 넣어 두시고 봐주시면 감사할 듯 합니다.

 물론 오른쪽 아래에 있는 RSS 등을 통해 구독하시는 방법도 있고,

 자주 들어오시는 분들은 인터넷 주소창에 g 한 글자만 쳐도 

 제 주소가 바로 뜰 것입니다. 

 이 공지를 못 보신 분들을 위해 

 당분간 이 공지는 계속 내보낼 예정이에요.~

 여러분, 언제나 감사합니다!


 * 독자님들 중에, 비밀댓글을 썼는데 자신이 볼 수 없는 경우가 있으시지요? 그런 분들은 티스토리 ID가 있으시면 로그인만 하면 비밀댓글을 저절로 볼 수 있게 되고, 제가 쓴 답글 확인도 더 쉬워지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only제 블로그 독자님들에게만 티스토리 초대장을 나누어 드릴 생각입니다.

댓글을 단 한 번이라도 쓰신 적 있는 분들은 제가 웬만하면 기억하고 있으니(혹은 댓글 쓰신 여부를 검색할 수 있으니), 반드시 이메일 주소와 함께 초대장을 신청해주세요. 5월 10일까지 신청받습니다. 

* 이제까지 신청하신 분들에겐 모두 초대장이 발급되었으니 이메일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저를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