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 독자 분께서 제가 술을 안 한다는 이야기에 어쩐지 아쉽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 와인 한 잔 쯤 독자님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그런 모습을 기대하고 계셨던 듯 합니다.
그런데 제가 술을 안 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독자분들께 부끄럽지만 그 솔직한 이야기를 오늘 밝혀봅니다.
저는 서른 살이 넘도록 술을 입에 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름대로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만 생각했었지만, 서른 살이 넘어 어떤 해외출장을 계기로 제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술을 마시지 않는 진짜 이유'를 발견하고 저 스스로도 놀라게 되었습니다.
당시 출장 지역에서 중요한 세미나가 있었고, 저와 동료들, 그리고 선배들과 함께 출장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시기의 저는 내적,외적으로 어려움이 많아 한참 심리상담을 받던 때였는데, 출장을 떠나기 전에 상담 선생님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올리브나무 씨. 이제껏 올리브나무 씨는 너무 스스로를 가두고 통제하며 살아왔기에 마음에 이런 깊은 병이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많은 것도 아니고, 또 그 모든 것이 범죄도 아닌데, 이제 좀 스스로를 자유롭게 놓아 주세요. 그렇다고 방탕하게 살라는 뜻은 아니지만, 이제껏 해보지 못 했던 것이 있다면 한 번 해보기도 하면서 좀 일탈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좋겠어요. 갖고 있는 규율과 틀들이 다 무너져 내린다면 엄청난 혼란이 오겠지만, 그 후에 자신을 좀 용서해주고 이해해주고 나면 다시 새롭고 좀 더 스스로에게 너그러운 규율들을 만들 수 있을 거에요. 만약 이대로 그냥 스스로를 방치하다가는 정말 어느 순간 몸의 병으로 연결 되거나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올 수도 있습니다. 부디 좀 긴장의 끈을 놓고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세요. 이번에 해외에 나가신다니, 일 때문에 나가는 것이지만 그래도 좀 더 자유로운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상담 선생님의 충고를 기억하며 출장길에 올랐고, 세미나가 거의 마무리 되어가던 어느 날 제가 좀 어려워하는 선배님 방에서 열 명 넘는 인원이 세미나를 마무리하는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략 이런 식의 구조로 회의를 할 수 있는 테이블이 있는 큰 방이었습니다.
(google image)
회의가 끝난 후에 다들 아쉬운지 맥주와 안주를 사와서 마시자고 했고, 제가 술을 안 마시는 것은 동료들이라면 오래 일을 함께 하면서 다들 알고 있으니 제게 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그 때, 상담 선생님 말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저는 그냥 남들이 다들 별 것 아니라고 하는 맥주를 태어나 처음으로 한번 마셔볼까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저 혼자 술 마시는 동료들과 떨어져 노트북 옆에 앉아 분위기를 맞추느라 음악을 골라 틀어주는 DJ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들끼리 부어라 마셔라 하는 동료들에게 "저도…맥주 한번 줘 보실래요?"
라고 말을 했고, 한 선배는 "이 사람이 오늘 왜 이래? 그렇게 회식을 해도 절대 안 마시더니? 괜찮겠어? 술 마셔본 적 없다면서. 하긴 간이 깨끗해서 한잔 마신다고 큰 일 나는 건 아니겠다." 라며 맥주를 한 병 건넸습니다.
그렇게, 태어나 처음으로 맥주를 한 병 다 마시고...저는 제 주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정신은 멀쩡했는데, 문제는 몸이 말을 듣질 않고 제 멋대로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긴 설명없이 결과만 말씀 드리자면, 그 호텔은 상당히 고급 호텔이라 그 방엔 아주 멋진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저는 난생 처음 맥주 한 병을 마신 후, 아까 계속 반복 재생되게 틀어 놓은 음악들에 맞추어, 그 멋진 커튼을 붙잡고, 네 시간 동안 계속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었습니다...
춤을 잘 추었을까요? 그럴리가요! 장르도 불분명한 흐느적 춤을 계속 추니, 연세가 많으신 선배는 저에게 이런 농담까지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술 마실 때 저 사람을 불러서 맥주를 주자고. 그러면 알아서 댄서가 되어 주겠네! 지치지도 않나. 몇 시간을 저러고 있네..쯧쯧.."
그뿐만이 아닙니다. 막판엔 술이 깰 법도 한데, 제가 옆에 술을 마시고 있던 모든 동료들에게 계속 귀찮게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하며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제가 많이 존경합니다!" 뭐 대략 이런 말들을 하며 실실 거렸던 것입니다..ㅠㅠ
ㅠㅠ 아, 창피해요.
늘 일만 같이 하던 동료들과 선배들 앞에서 얼굴이 벌개져서 네 시간이나 춤을 추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모두의 뇌에서 그 기억을 지우고만 싶습니다만 평소 늘 각 잡고 있던 저의 황당한 주사에 놀란 동료들이 이미 동영상과 사진을 잔뜩 찍어서 증거로 남겨 서울에 돌아온 후에도 자기들끼리 돌려보며 즐거워하며 동영상이 퍼진 후라, 뭐, 그냥 증거 인멸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출장지를 밝히지 못 하는 이유도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동료가 혹시나 이 글을 볼까 싶어서입니다. 넘 창피해요.)
자...결국 상담선생님 말씀대로 제가 해보지 못 했던 일을 해본 것은 잘 한 것 같지만, 결국 그 이후로 저는 술을 입에 다시 대지 않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수 씨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작년에, 동수 씨 친구들과 지난 번 다른 글에서 소개한 이곳 로도스의 '바 골목'의 지인이 운영하는 바Bar에 가볍게 한잔들 하러 간다고 해서 저도 따라갔습니다. 물론 저는 이런 모든 모임에서도 그냥 주스를 마시는데, 그리스인들은 워낙 천천히 술을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술자리를 갖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인사불성이 될 만큼 심하게 취하지 않으니, 저처럼 술 안 하는 사람이 끼어 있어도 그 자리가 크게 불편하진 않습니다.
어떻든 제가 시킨 오랜지 주스가 나왔고, 저는 주스를 한 두 모금 마시며 동수 씨와 친구들과 이런 저런 그 간 있었던 이야길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약 5분쯤 지났을까요?
머리가 핑~하고 돌더니, 눈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잘 못되었다!' 여겼지만, 이미 제 몸에서는 알코올로 인한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분명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통제가 안 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저희가 앉은 테이블은 야외에 있는 테이블이었는데, 그날 그곳엔 젊은 관광객들로 빽빽하게 자리가 없을 만큼 붐볐었고, 한쪽에서는 스웨덴과 스위스 젋은이들이 간이 칠판에 마신 잔 수를 써가며 나라간의 술 마시기 내기를 열띠게 벌이고 있는 중이라서 "마셔라!!" "이겨라!!" 라고 응원을 하며 몹시 시끄러웠습니다.
대략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로도스의 한 Bar 사진입니다.)
그리고 몸이 통제되지 않은 저는 그 테이블로 다가갔고, 저도 모르게 그 친구들과 같이 응원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겨라! 어느 나라든지 이겨라!" 라면서요...
약 스무 명 정도의 젊은이들은 저를 정말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워낙 취해들 있어서 어느새 제 어깨에 어깨동무를 하며 함께 응원을 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동수 씨와 친구들이 "올리브나무!!!" 라고 저를 불렀지만, 제 몸이 말을 안 들으니, 제가 부름에 응할 리가 없었겠지요.
그러다 저는 또 누군가 저를 조종이라도 하듯 그 무리를 빠져 나와 다른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영어로 인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그리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녕하세요? 여긴 처음 오셨나요?"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올리브나무입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사태가 이쯤 되자, 동수 씨와 친구들은 도저히 안 되겠다 생각해서 저를 붙잡고 집에 가자고 말렸지만 저는 뿌리치고 또 국회위원 출마라도 할 사람처럼 인사를 하고 돌아다녔고 급기야 동수 씨와 친구들은 제 팔과 뒷목덜미까지 잡고 질질 끌고 그 곳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 바 골목을 빠져 나오는 동안에도 사람이 많은 이곳 저곳 노천 바에 인사란 인사는 다 하고 다녀서 친구들이 겨우겨우 말려 저를 차에 던져 넣었는데요.
동수 씨와 친구들은 제게 급히 뜨거운 블랙 커피를 사다가 먹였고, 그 커피를 다 마시고 나니 행동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너무 창피해요!
나중에 어째서 오랜지 주스를 마셨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나 알아 보니, 옆 친구가 시킨 칵테일과 제 주스가 바뀌어 세팅이 되어서 색깔이 똑같아 제가 주스인 줄 알고 그냥 마신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지요.
오랜지 주스와 칵테일
이런 저런 사건 이후로 그리스 친구들과 가족들은 제게 절대로 술을 권하지 않게 되었는데요.
동수 씨는 이런 저의 약점을 이용해 어떤 가족 파티에서는 일부러 저 모르게 제 주스 잔에 샴페인을 몇 방울 섞어서 제가 고개를 상모 돌리듯 뱅글 뱅글 돌리며 정신을 못 차리면, "어! 올리브나무가 실수를 술을 먹었나 보네요. 오늘 설거지는 고모님들이 좀 하세요."라며 저를 방으로 올려 보내는 센스를 발휘해 파티 후 집안일에서 저를 구해주기도 했답니다.
남편이 이런 면이 있어,
늘상 모이는 시댁식구들과 살아나가는 데에 한 숨 돌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평소에 성격이 살짝 이상할 때가 많지만 센스라도 있으니 감사한 일이에요.
아! 결론적으로 제가 첫 번째 주사를 겪은 후 발견한, 젊을 때부터 술은 안 마시게 된(그러다 보니 잘 못 마시게 된) 무의식의 이유는 이랬습니다.
제가 어릴 때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거래처 접대를 하고 밤 늦게 집에 오시면, 공부를 하던 제가 깨어있다가 잔뜩 취해 몸도 못 가누시는 아버지의 뒤치다꺼리를 했던 적이 자주 있었는데,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접대 때문에 그렇게 드시고 괴로워서 거실에 뻗어계신 모습을 보면서, 그냥 가족들을 위해 돈 버시느라 고생하시는 그 모습이 그렇게 안 되 보였고 평소와 달리 약해 보이는 아버지 모습이 정말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나는 절대 술을 마시지 말아야지, 술을 마시고 저렇게 무너지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지, 했던 것입니다...
결국 여전히 술을 마시진 않지만, 이젠 좀 망가지고 좀 실수해도 그것이 잘못이 아니란 것 정도는 깨닫게되어 참 다행입니다...나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남도 용서하기 힘든 법이니까요.
제가 비록 술은 안 마시지만 그래도!
어느 술모임에서도 분위기는 잘 맞추고 취한 분들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마지막에 차례로 집에 태워보내는 운전기사 노릇도 하곤 하니, 독자님들 많이 아쉬워 마시길 바랄게요!
오늘 저의 부끄러운 솔직한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힘찬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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