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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독백

3개월 이별했던 소설 속 주인공과 다시 만나다.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2. 22.

3개월 이별했던 소설 속 주인공과

다시 만나다.

 

 

 

 

 

 

이 아이를 키우기 시작한 것은 그러니까 2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장편 분량의 소설을 써보자고 소설의 골격을 정하고 조금씩 조금씩 써내려가다 보니 어느덧 이야기는

절정 부분에 다다라 있는데, 연말연시 연이은 손님접대와 이러저러한 사건들로

소설 속 주인공은 저와 작별해 몇 개월이나 컴퓨터 속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저의 첫 소설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글에 재주가 있는 아이는 아니었고,

엄한 부모님을 피할 수 있는 은신처로서의 책 읽기에, 무섭게 몰입하는 아이었습니다.

당시 읽었던 고전 소설 작은아씨들의 조세핀도 작가였고, 다섯 권으로 출간되었던 장편소설 빨강머리 앤 역시 선생님이면서 작가였습니다.

그들이 제게 글을 쓸 용기를 주었습니다.

첫 단편은 친구들에게 읽혀졌고 그리고 누군가의 손에선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시, 단편, 중편 소설들, 드라마 대본, 시놉시스, 20년 넘게 써온 일기들, 3년간 편집했던 경제지의 사보기사들. 4년간 매 달 발행하는 모 회지 칼럼까지.

제가 혼자 써 내려갔던 글들을 다 모아보니 이사짐 박스 몇 개를 가득 채웠지만, 한국에서 그리스로 이사 오며 많은 양의 원고를 폐기시켰습니다.

경제지와 연계되어 발행되었던 사보기사들과 회지 칼럼을 제외하고는, 스무 살 이후로 제 글들 중에 대중이나 타인에게 공개된 것이 거의 없었고, 혼자 쓰고 스스로 독자가 되어 들여다 본 세월이 길어서인지 안 보고도 외워지는 내용들과 이제는 안녕하고 싶었었나봅니다.

 

보통 작가가 되겠다, 작가가 되고 싶다, 책을 쓰고 싶다는 사람들을 보면, 여러 문학상이나 백일장 신춘문예지에 본인의 노력의 결과물인 글들을 투고하는 보통 수순을 밟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해마다 문학상이란 문학상 수상작을 엮어 펴낸 책들을 꼬박꼬박 구매를 해 읽어보면서도 제 글에 대해 인정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지 글이 읽혀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요.

어찌 보면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글 속의 세계를 좋아하고......, 일상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다른 비밀스런 세계를 갖고 있다는 묘한 쾌감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인정받을 만큼 글에 자신이 없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글을 공개하게 된다면, 글에 대해서

단 한두 사람이라도 기뻐해주고 즐거워해주면 그걸로 족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 글이 그들의 삶을 읽기 전보다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사실 그 조차 쉬운 일은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게 원고란 원고들, 수기 일기장 십여 권까지 폐기처분하고, 그리스에 정착해 새롭게 쓰기 시작한 글이 지금의 소설입니다.

그리고 언제 완성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이 소설을,

틈날 때마다 한 페이지씩 주인공 아이와 함께 울며 웃어가며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스무 살 즈음 고 박완서 작가에게 꽂혀서 대학 도서관에 당시 존재했던 작가의 책이란 책들을 빌려 미친 듯이 읽어 내렸던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그녀의 살아 꿈틀대는 필체와 스토리전개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고, 급기야 학보에 박완서에 대한 칼럼을 의뢰받아 써내려가면서도 남들은 늦었다는 불혹의 나이에도 등단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빛나는 필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가 불혹을 코 앞에 둔 나이에 서보니, 그렇게 더디 갈 줄 알았던 이십년의 세월이, 불현듯 발견한 모기물린 자국처럼 생경스럽고, 모기에 물리도록 모르고 정신없이 잤네, 라고 말하듯 세월이 흐르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살아 왔구나 싶습니다.

등단을 꼭 하고 싶다거나 이 소설이 꼭 출판되었으면 좋겠다거나 박완서 작가처럼 늦게라도 등단해 오랫동안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거나,

그런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꼭 이 이야기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본해 한 두 친구들에게 읽어 봐주길 청하고 싶습니다. 거기에 그들이 제 글로 조금이라도 풍성한 순간을 얻기라도 한다면, 그걸로 저는 충분히 행복할 것 같습니다.

 

 

지중해를 배경으로 한,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우체부 마리오처럼,

저는 글을 쓰는 게 좋고, 글 쓰기를 통해 발견해나가는 새로운 것들이 좋습니다.

 

매니저 씨를 알기도 전에, 그리스에 첫 여행을 오기도 전에,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쳇바퀴 돌며 살았던 십여 년 전.

쥐뿔도 없으면서 그리스에 대한 첫 꿈을 꾸었던 이유도, 영화나 TV 속에서나 보았던 파란 지중해, 그리스 같은 곳에 작은 별장을 하나 지어놓고, 노년에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막연한 꿈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구한 그리스 섬 사진 한 장이, 십년 넘게 저희 집 벽 한 켠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리스로 첫 여행을 오고, 두 번째 여행을 오고, 세 번째 여행을 오고... 그리스인인 매니저 씨와 한국에 살게 되었을 때조차도, 제가 그리스에 살게 될 날은 노후였지 아직은 젊은 이런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 경제 위기로 가족 사업을 돕기 위해 매니저 씨가 먼저 그리스로 돌아오고, 저와 딸아이가 그리스로 들어오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시점에 그리스에서의 삶이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보니 비록 복닥거리는 가족문화에서 일복 터져 손마디에 물 마를 날 없지만, 여전히 한국에서처럼 일상에 쫓기고 일에 치여 살고 있지만, 한국과 많이 다른 문화에 인종차별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리고 제가 예상했던 작은 섬의 별장은 아니지만, 지중해 그리스에서, 어떻든 큰 섬 로도스의 카페테리아에서, 저는 글을 쓰는 제 꿈을 이룬 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쁜 일상이지만, 3개월이나 이별했던 이야기속의 그 아이를 만나는 번거로운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이 번거로운 글쓰기작업은 대학 진학 때조차 배고픈 직업이라고 전공으로 선택하지 못해, 치열한 사회생활로 묻어두었다가,

다시 꺼내보고 다시 묻고 다시 꺼내 보았던, 돌아서 돌아서 온, 제 꿈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소설도, 칼럼도, 기사도, 시도, 드라마대본도 아니지만

제가 내키는 대로 그리스에 대해 써내려간 글들을 블로그에 들어와 읽어주시고 추천해주시고 댓글 달아 주시는 여러분들이,

저는 참 고맙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글을 읽기 전까지,

제 꿈이 무엇이었는지, 또 제가 소설을 쓰고 있는지조차 모르셨겠지만,

제겐 마치 여러분이 제 꿈을 응원해주는 응원팀 같이 여겨집니다.

비록 대중에게 공개할 수 있을 지 없을 지, 여전히 미지수인 소설을 쓰고 있는 중이지만,

언제 완성할 수 있을지 그 조차도 기약이 없지만,

이 소설 속 아이의 이야기를 잘 마무리해서

다시 이 아이와 제대로 이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랜만에 영화 일포스티노의 OST를 함께해요>

 

* 박완서 작가의 소설들을 몰아 본 것도 저의 스무 살 즈음이었고,

  일포스티노 영화를 보고 지중해에서의 글쓰기를 동경하기 시작한 때도 그 즈음,

  제 소설 속의 주인공의 현재 나이도 그 즈음이네요.

  당시는 막연하고 암담했지만, 돌아보니 아름답고 찬란한 나이구나, 싶네요.

 

희망해여러분,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