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속의 한국

내 그리스인 친구, 이번엔 오징어땅콩을 이것과!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4. 4. 24.

 

 

 

 

지난 번에 새우과자를 와인과 함께 먹었던 제 그리스인 친구 마리아를 기억하시나요?

몇 주 전 이 친구 집에 차를 마시러 갔었는데, 당시 저희 집이 한참 페인트칠 중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을 때여서 급하게 에 단 한 봉지 남은 오징어땅콩과자를 들고 갔었습니다.

새우과자를 와인안주로 맛있게 먹었던 친구이니, 좀 더 맛이 독특한 오징어땅콩도 와인과 먹으려고 하려나? 내심 궁금하기도 했었습니다.

 

과자를 들고 집에 들어가니, 친구는 이틀 야근 후라 후줄근한 잠옷차림에 몽롱한 상태로 저를 맞이했습니다.

사실 그리스의 국립종합병원 의사는 월급이 일반 사립병원 의사만큼 아주 많은 것도 아닌데다, 경제 불황으로 사립병원보다 거의 무료나 다름없는 국립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더 야근이 잦아져서, 제 친구는 요즘 늘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데 이런 상황에서 엄마가 자주 야근을 하고 집을 비우게 되니, 자연스럽게 아빠가 집안일이며 아이들 학교나 학원을 데리고 다니는 일을 도와야 하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마리아의 남편은 일본계 대기업 로도스 지사에 10년이상 근무하다가 경제 위기 이후 회사가 아예 로도스에서 철수하면서 실직자가 되어 재취업을 못 하고 있는 상태여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일은 거의 전담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도 남편은 그리스 남자이다보니, 기본적인 요리, 빨래, 다림질 등의 집안일은 대부분 마리아가 하고 있는데요.

제 친구는 이런 상황에서 몹시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을 텐데도, 어차피 50대인 남편이 나이가 많아 재취업은 어려울 것 같다고 여겼던지 차라리 베이비시터를 쓰지 않고 아이들을 잘 돌봐주면 좋겠다고 여기는 듯 했습니다.

 

이렇게 쉬는 날이면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 멍한 얼굴로 있곤 하지만, 그래도 성격이 활기찬 편이라 늘 저를 웃으며 반겨 주는 게 마리아의 큰 장점인데요.

이 날도 마리아는 아이들에게 온갖 과일을 잘라주며 피곤한 중에도 밝게 웃어 주었고, 제 딸 마리아나는 대접받은 과일을 먹으며 '크면 같이 한국에 가겠다는 알리끼'에게 한글 읽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과일을 먹으며 친구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는 마리아나

 

 

제가 한글 가, 나, 다를 읽고 있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보고 있던 중에, 친구 마리아가 오징어땅콩과자를 까서 볼에 담아 같이 먹자고 식탁에 올려 놓는 게 보였습니다. 보통 새우과자를 받으면 와인안주로 먹겠다고 아이들 손 타지 않게 싱크대 높은 선반에 넣어두었던 그녀가 말입니다!

저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는데요.

왜냐하면…

저희는 둘 다 커피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늘 블랙으로 커피를 마시는 저는 '블랙커피 오징어땅콩과자조합'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친구는 처음 먹어 보는 과자라서 맛에 대한 선입견이 없어서였을까요?

블랙커피오징어땅콩과자를 같이 먹으며 맛있다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이틀 연속 야근으로 몹시 고단한 마리아를 보며,

저는 혼자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혹시 너무 피곤해서 미각을 잃은 거야? 마리아???

평소엔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하지만 친구는 오징어땅콩과자 커피 끝까지 정말 맛있게 먹었답니다.^^

 

그런데 엄마가 맛있다고 하자, 아이들도 맛이 궁금했는지 한 두 개 집어 맛을 보더니, 큰 아이 알리끼는 사과와 함께 오징어땅콩 과자를 먹기 시작했고, 작은 아이 이리니는 플레인 요거트와 오징어땅콩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오징어땅콩과자를 입에 문 채로 사과단맛 0%의 플레인요거트를 먹는 아이들

 

저는 분명 먹고 나면 이상하다고 할 텐데, 미처 말릴 틈 없이 벌어진 상황에 몹시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들은 다들 열심히 나름의 조합대로 계속 먹었고, 결국 오징어땅콩과자 한 봉지는 금새 없어져버렸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집에 돌아가는 저와 마리아나를 현관에서 배웅하던 마리아가 제게 남긴 말은 이랬습니다.

 

"나, 오늘 되게 피곤했는데, 이렇게 와서 말동무도 해주고

한국의 오징어땅콩과자도 갖다줘서 정말 고마워! 올리브나무!

덕분에 아주 스트레스가 해소 되었어!"

토닥토닥

 

제게 고맙다고 하다니요.

사실 당시 페인트칠과 집안 공사로 씨름하느라 스트레스 받았던 저 역시, 친구를 만나 한국과자를 까먹으며(비록 블랙커피와 함께였지만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던 시간이었는데 말이지요.

 

 

여러분, 이래저래 속상하고 분통터지고 가슴 아픈 날들을 보내느라

입맛이 없고 먹어도 소화가 잘 안되시는 분들도 계시지요...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내가 뭔가를 당장 어떻게 할 수도 없을 때,

이렇게 친구랑 과자 한 봉지 까먹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만 나누어도

어떤 땐, 맺힌 게 좀 해소되나 봅니다... 

부디 그렇게 힘내시는 하루 되시길 바랄게요!!

파이팅입니다!

 

관련글

2014/03/21 - 뜻밖에도 새우과자를 이것과 먹는 내 그리스 친구

2014/03/29 - 뭐? 그리스 아이들이 그것 때문에 한국에 가겠다고?!

2013/12/23 - 그리스인들이 연말을 보내는 좀 부담되는 문화

2013/02/01 - 점잖은 여자들은 절대 모르는 그리스와 한국의 비밀연애.

2013/11/10 - 그리스인들의 어느 의미 있는 시청 앞 집회

2013/03/23 - 그리스 남자들이 집안일에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그들만의 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