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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한국

그래도 한국에 가고 싶어? 그리스인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4. 4. 23.

 

한국어를 배우는 그리스인 친구들은 1~2년 내에 한국에 가려고 돈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에서 한국은 가까운 거리가 아니고 직항이 없는데다, 2주 정도 머물 숙박비와 좋아하는 한국 제품들이나 한국 음식을 넉넉하게 살 비용을 생각해서 예상 경비를 여유있게 책정하고 돈을 모으는 것 같았습니다.

 

외국인이면서도 한국인 만큼이나 한국을 사랑하는 친구들이다 보니, 이번 세월호 사고에 대해서도 실시간으로 업무 중간 중간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며 상황을 들여다보는 듯 했습니다.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이 얼마나 컸던지 둘 다 제게 수시로 전화해 혹시 자신들이 모르는 새로운 소식을 제가 알까 싶어 묻고 또 물어 왔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 디미트라가 오늘 생일이어서 퇴근 후에 모두 함께 만나기로 했는데, 제가 급한 일이 생겨 저희 사무실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일을 처리하고 돌아왔더니 동수 씨가 황급히 디미트라에게 인쇄한 A4용지를 접어서 건네는 게 보였습니다.

 

나중에 카페에 가서 그 종이가 뭐였냐고 제가 묻자, 디미트라가 제게 종이를 펴서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는데요.

거기엔 한국어 욕들과 그것을 영어로 번역한 리스트가 자그마치 A4용지 3장에 빽빽하게 인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 이걸 동수 씨가 줬다고요?"

제가 어이가 없어 묻자, 디미트라와 갈리오삐가 어색하게 웃으며 제게 대답해왔습니다.

"글쎄 '올리브나무가 이런 건 절대 수업에서 안 가르칠 거야. 하지만 한국에 가려면 알고 있어야만 해.' 라며 주었어요. 하…하…"

라고 말이지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는데, 그 한국어 욕 리스트를 보고 있자니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동수 씨가 한국에 살 때였는데, 토요일이면 의류업을 하시는 큰 형님 뻘의 제 한국인 지인을 따라 동대문을 비롯해 여러 시장을 새벽부터 둘러 볼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그 지인 분은 동수 씨가 한국에 적응하려면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게 좋다고 일부러 데리고 다니며 이곳 저곳을 구경시키고 맛있는 것을 사주시곤 했었는데요.

그렇게 그 형님을 따라 한국의 상인들 사이에 섞여 같이 물건도 팔아보고 시장 통에서 밥도 먹어보면서 동수 씨가 깨달은 것이 있다고 했었습니다.

1. 한국 사람들은 참 인정이 많다.

2. 하지만 한국에서 살려면 욕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첫 번째 이유는 언제 누가 내게 욕을 해 와도 못 알아들으면 안 되니까. 또 다른 이유는 한국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들만큼이나 국가나 정치인들에게 평소 화가 많이 나 있는데, 모여서 억울한 삶에 대해 상스러운 욕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아서 나도 한 마디씩이라도 거들려면 알고 있어야 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삶이 누구보다 고단한 시장 상인들을 경험했기에 동수 씨가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는데, 오늘 한국어 욕 리스트를 인쇄까지 해서 한국에 가고 싶어하는 친구들에게 주는 것을 보면서, 아마 당시에 동수 씨가 느꼈던 욕이 필요했던 상황들이 상당히 진지하게 여겨졌었나 보다 싶어, 헤아려주지 못 했던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그 한국어 욕 리스트를 고이 접어 가방에 집어 넣으며 또 다시 세월호 생존자 소식을 물어 오는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좀 복잡하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착찹한 기분이 들었는데요.

경치 좋은 고성 안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저는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그래도 한국에 가고 싶어요? 이렇게 욕 리스트를 알아야 할 만큼 울분에 찬 사람들이 많은 곳인데… 그리고 알다시피 부실하고 방만한 해양산업 관리와 국가 위기 대응 체제가 잘 확립되어 있지 않아 이런 심각한 상황이 발생해버린….그런 한국인데도 말이에요?"

 

제 말을 진지하게 듣던 친구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한국이잖아요. 그게 한국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한국은 내가 좋아하는 제품들을 많이 만들어 팔고, 맛있는 음식이 많고,

우리가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매주 방송해주고, 멋진 가수들이 있고,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술력이 좋은 나라잖아요.

우리는 여행가서 꼭 그런 한국을 경험하고 싶어요."

 

 

 친구들이 경험하고 싶은 한국

 

 google image

 

 

저는 그 친구들의 대답에 순간 눈물이 쏟아질 뻔 했었습니다.

한국인이 없는 지역에 살다 보니, 본의 아니게 한국인의 대표격으로 이곳에 살아가고 있어서 (어떤 한국의 지인은 우스갯소리로 제가 그리스 로도스 한인회장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밖에 없으니 웃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한국에 대해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주변 그리스인들의 모든 긍정적 시선이 제게 쏟아지게 되고 제 어깨도 으쓱해지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세월호 사고가 있은 후 안 그래도 실종자 학생들을 생각하면 한국인 어른으로서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한 없이 슬퍼지곤 했었는데 주변 그리스인들의 부정적 시선들까지도 온통 제게 쏟아지며 "한국 뭐야? 그 대단한 기술력을 갖고 있는 나라가 왜 이런 일을?" 이라는 지탄의 말들을 들을 때마다 이곳의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모두 제 잘못인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감정들도 희생자 가족들이 겪는 아픔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요...)

 

그리스인 친구들은, 제일 먼저 탈출한 선장을 욕하며 아직 생존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사망자 수만 늘어가는 현실에 대해 너무 가슴 아파하면서도,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디미트라 생일이라며 딸아이가 실을 엮어 만들어서 두 사람에게 선물한 팔찌를 보면서 '무한도전 자메이카 편'하하와 스컬 생각이 난다며 정말 좋아했습니다.

 

 마리아나가 만들어 두 사람에게 선물한 팔찌들

 

 

무한도전 자메이카 특집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한국 예능을 매일 챙겨보는 게 큰 휴식이 되어 평소에 정말 좋지만 실종자를 찾는 것이 현재는 가장 중요한 일이니 예능이 몇 주 결방되어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친구들을 보니, 비록 외국인이지만 국민들이 슬픔과 분노에 빠진 기회를 틈타 정치적 이익을 노리며 이상한 발언을 쏟아내는 한국정치인들에 비해 어쩌면 훨씬 더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들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도 한국에 가고 싶다는 이 친구들에게, 꼭 한국의 좋은 것들을 구석구석 돌아보며 안내해줄 기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힘내시는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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