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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한국

그리스에서 인터넷으로 세배하고 울어버린 딸아이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4. 1. 31.

 

한국이 설이란 것을 어제야 알았고 오늘 부랴부랴 한국의 부모님께 인터넷 메신저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오랜만에 딸과 손녀 얼굴을 보시며 반가워 하시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 동안 전화통화는 자주 했어도 얼굴을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어서, 며칠 전 물어 보셨던 제 가족 안부를 또 물어보시며 궁금해하셨습니다.

한참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던 중, 딸아이는 갑자기 "할머니, 할아버지! 잠깐만요~~~~~금방 다시 올게요~~~" 라며 2층으로 올라가버렸고, 아마 뭔가 새로 만든 것을 보여주려고 그러나 보다 싶어 우리는 대화를 하며 딸아이가 내려오길 기다렸습니다.

 

오잉? 그런데 2층에서 내려온 딸아이는 어느새 한복으로 갈아입고 있었습니다! 원래 워낙 큰 한복이었기에 작년까지도 넉넉하게 입었었는데 얼핏 봐도 길이도 껑충 짧아지고 소매도 짧아져 있었습니다.

어찌어찌 속치마까지 잘 갖춰 입은 딸아이는 손가락을 입에 대고 제게 쉿 쉿 하더니 "할머니~할아버지~ 3초만 있다가 저를 봐주세요~~~" 라고 컴퓨터 뒷쪽에 서서 부탁을 했고, 저는 아이가 뭘 하려는 건지 눈치 챘기에 고개짓으로 거실 쪽을 가리켰습니다. (세배하려면 거실에서 해~라는 무언의 신호였지요.^^)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지, 녀석은 카펫이 깔려 있는 거실까지 갈 생각도 하지 않고 차가운 부엌 바닥에 서더니, 엄마! 엄마! 컴퓨터 돌려 주세요! 얼른요! 얼른요! 호들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서두르는 모습에 저는 피식 웃음이 나왔고, 무슨 일인가 기다리시던 부모님께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컴퓨터 이제 돌릴게요. 마리아나가 할머니 할아버지께 보여드릴게 있대요." 라며 하나! 둘! 셋! 구령에 맞춰 컴퓨터를 딸아이 쪽으로 돌려 놓았습니다.

 

 

 

 

 

 아이쿠..녀석은 부엌 바닥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인터넷 메신저를 통해 순식간에 세배를 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딸아이의 깜짝 선물에 아주 크게 손뼉까지 치시며 웃으셨고, 할 건 다 해 놓고 쑥스럽게 몸을 배배 꼬며 "할머니이~할아아버어지~ 새해 보옥 많이 받으세요오~"라며 배시시 웃는 딸아이 모습에 또 박장대소 하셨습니다.

 

 

 

한 바탕 세배가 끝나고 또 한참을 컴퓨터 앞에 앉아 그간 할머니 할아버지와 못 했던 이야기를 나누던 딸아이에게 "시간이 이제 너무 늦었다. 얘. 한국은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야. 할머니 할아버지 주무셔야 하니까 이제 그만 얘기하고 다음에 또 얘기하자." 라고 말하자, 딸아이는 무슨 신파극 여주인공처럼 옆에 있던 쿠션에 그만 퍽 하고 엎어져서 얼굴을 묻더니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하신 부모님은 "왜 울어? 응? 왜~" 라고 물어 보셨지만, 사실 왜 우는지 몰라서 물어보신 것은 아니실 테지요.  딸아이가 한국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인터넷으로 얼굴을 보고 나면 으레 있는 일입니다.

 

우는 딸아이를 달래느라 할머니는 급하게 말씀 하십니다.

"마리아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올해는 꼭 그리스에 한번 갈게. 그러니까 울지마. 또 만나면 되잖아. 그렇지?"

"응. 할머니. 할아버지. 꼭 와야 돼요. 난 지금부터 기다릴 거에요."

겨우 눈물을 멈추는 딸아이입니다.

(사실은 딸아이가 울 때 저도 눈물이 나서 혼났는데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는 것을 녀석이 눈치채지 못해서 다행이다 싶습니다.)

좀 우스운 모양새이지만 인터넷으로나마 세배를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런 생각을 해준 딸아이가 못 내 고맙기만 했습니다. 세뱃돈 같은 건 필요 없다고, 그냥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자기가 커서 결혼하고 애기를 낳고 그 애기가 다시 어른이 되는 것까지 보시도록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녀석을 보니, 차마 어색해서 부엌 바닥에 엎어져서 인터넷으로 세배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부모님께는 늘 뚝뚝하기만 한 저보다 낫구나 싶습니다.

 

 

하지만!

저녁에 퇴근 후 오늘 일에 대해 전해 들은 매니저 씨의 행동 덕분에, 저와 딸아이는 언제 슬펐냐는 듯 배를 쥐고 웃을 수 있었는데요.

"뭐?! 금요일이 설날이라고?! 나 무조건 쉴 거야! 사무실 안 나가!!!!!"

"왜? 왜 당신이 쉬어? 여긴 휴일도 아니라고! 쉬면서 하루 종일 도대체 뭘 할 건데????"

웃겨"우하하하!!! 모든 것을 한국처럼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거지~! 바닥에 앉아서 떡꾹도 먹고!!! 우하하우하하하!! 아이~~~~신나!!!"

 

다리가 구부러지지 않아 바닥에 앉을 줄 몰라 그 좋아하는 감자탕도 먹으러 못 갔던 사람이, 한국 설을 기념하고 싶은 방법이 그리스 집 찬 바닥에 앉아 떡국을 먹는 거로군요.....--;;

ㅎㅎㅎ"이럴 때 보면, 당신... 조금 이상한 사람 같아......"

 

 

여러분 즐거운 설 보내세요!

좋은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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