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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한국

20년 된 한국 리코더, 그리스에서 딸아이 사랑을 받다.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4. 1. 14.

 

 

 

그리스로 이민을 올 때 많은 물건을 다른 이들에게 주거나 버리고 왔습니다.

가져 올만큼 새것에 값나가는 물건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괜찮은 가구나 책들은 가져오기엔 많이 무거웠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더 이상 들여다 보게 되지 않는 초,중,고 대학교 졸업앨범, 20년 넘게 수기로 쓴 일기들까지 모두 버리고 왔습니다. 마치 가기 싫은 곳에 가야 하는데 돌아갈 배가 있으면 되돌아 오고 싶어질까 그 배를 불태워 버리는 심정으로 말이지요.

이런 사정으로, 지금 그리스 집에는 한국에서부터 오랫동안 쓰던 물건이 많지 않습니다. 

 

처음 이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엄마가 보내신 소포가 도착했는데, 그 상자엔 이런 저런 필요한 물품들 외에도 딸아이 앞으로 보내는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만들기를 좋아하는 딸아이를 위한 만들기 재료들과 오래된 리코더였습니다.

 

 

 

그 리코더가 정말 눈에 익은 물건이라 한참을 이리 저리 돌려보며 바라보고 있는데, 만들기 재료를 보던 딸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리코더를 반겼습니다.

"엄마! 이거 내가 한국에 살 때 막 불던 건데!"

"그래? 이게 누구 리코더야? 이거 되게 오래된 리코더 같은데…"

"응. 할머니께서 그러셨는데, 막내 이모 리코더래. 이모가 쓰던 건데 막내 이모 미국가면서 방 정리를 할 때 나왔대. 그래서 한국에서도 내가 막 불고 그랬거든."

"막내 이모 리코더? 그래서 눈에 익었구나. 그런데 너...이거 부는 법 알아?"

"아니. 그냥 막 부는 거야!"

오키

 

당시만 해도 어렸던 딸아이가 리코더 음계를 제대로 알 리가 없었고 그냥 혼자 신나서 삑삑 불며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이 리코더가 그리스 저희 집에 온 지도 몇 년이 지났고, 딸아이는 잊을 만 하면 한번씩 불어줘서 이런 물건이 우리 집에 있다는 것을 상기 시켜주었습니다.

 

지난 주 개학을 하던 날 첫날부터 음악시간이 있었고, 새로 부임하신 음악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다음 주까지 리코더(그리스어:플로예라φλογέρα)를 준비해 오라고 말씀 하셨는데요.

다른 아이들은 문구점에서 음악 실기를 위한 보급형 새 리코더를 구입해서 들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 아이들이 많이 사용하는 보급형 리코더입니다.

(물론 그리스에도 더 비싸고 특화된 리코더들이 있습니다.)

 

 

딸아인 우리 집엔 좋은 리코더가 있는데 왜 사냐며, 그 20년 된 리코더를 찾아 잘 씻어 말리더니 학교에 가져가겠다며 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저희 집에 있는 거의 20년 한국 A 악기에서 만든 리코더입니다.

사용할 때마다 깨끗이 씻는데도 여기 저기 세월의 흔적은 감출 수 없습니다. 

 

 

저는 딸아이에게 리코더 소리 내는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손가락을 잘 보라고 한 뒤, 쉬운 한국 동요들과 거의 두 세 음만 반복하면 되는 그리스 민요를 부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 리코더는 세월이 무색하게, 좋은 소리를 내 주었습니다.

 

다음 순서로 지켜보던 매니저 씨의 시범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분명 그리스 곡이긴 하나 소리가 좀 이상했고, 리코더를 앞으로가 아닌 옆으로 들고 불었습니다.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리코더 부는 법을 잊은 매니저 씨, 부는 채만하고 휘파람을 불었던 거로군요!

 

겨울이라 춥다고 수염을 기를 때까지 길러, 겨울 잠 자러 가야 할 것 같은

(한국) 피리 부는 (그리스) 사나이

ㅋㅋㅋ

 

 

 

다음 날, 딸아이는 음악선생님과 복도에서 마주쳤고 이 20년 된 리코더를 냉큼 보여드렸는데, 선생님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리코더, 좋은 건데? 어디서 났니? 응? 한국에서 샀다고?

그렇구나. 좋은 것을 구입했네?"

 

일이 바빠서 할말만 하시고 휘릭 가버리신 선생님.

그 덕에 딸아이는 다음 음악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좋다고 말해 준 이 리코더가, 실은 20년 전에 이모가 쓰던 리코더이고, 한국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다고요.

 

  

 

"엄마! 리코더가 스무 살이니까 나보다 오빠야?

그럼 이렇게 말해야겠어요!

흠흠...리코더 오빠! 나 음악 잘 배울 수 있게 부탁해요!"

 

라고 말해 큰 웃음을 준 마리아나입니다.^^

ㅎㅎㅎ

 

새것 사달라고 조르지 않고, 오래된 것이지만 한국에서 만든 의미 있는 물건이라고 좋아해주는 딸아이가 고맙기만 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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