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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한국

한국 세탁기에 드디어 반한 그리스인 시어머니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12. 13.

 

제가 처음 그리스로 이민을 오니, 시어머님은 15년이 된 월풀 세탁기를 쓰고 계셨습니다.

새로지은 뒷집으로 이사를 나가시며 소형 세탁기를 구입하긴 하셨지만, 제가 새 세탁기를 사고 싶다고 말을 해도 굳이 어머님이 쓰던 것이 그냥 쓸만하다고 저에게 바꾸지 말고 계속 쓰길 바라셨고, 그렇게 세제 투입구가 다 부서지고 온도와 압력을 수동으로 맞추어야 하는 세탁기와의 동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탁기는 이곳 생활이 해를 거듭할수록 말썽을 부릴 때가 많았습니다. 세월의 흔적을 견디기 어려웠겠지요.

세탁을 다 하고 나도 물이 흥건히 고여 있는 경우, 갑자기 작동을 안 하는 경우, 세제 투입구가 막히는 경우, 물이 줄줄 세서 세탁실이 엉망이 되는 경우 등 수십 가지 작동 오류를 거듭하며 이제 그만 일을 하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세탁기를 새로 사고 싶다고 말을 할 때마다, 당신이 사주실 것도 아니면서 저희 시어머님은 "아직 쓸만한데? 그냥 더 쓰지 그러니?" 라며 «난 반댈세!» 입장에 서 계셨는데요.

그러시면서 꼭 큰 빨래를 할 일이 있으시면 당신의 작은 세탁기로 감당이 안 되셔서 저희 집 2층 세탁실을 들락거리시며 이제 20년이 다 된 세탁기로서는 노년에 접어든 '월풀이'를 사용하시며 애정을 과시하곤 하셨습니다.

 

'어머님, 하루에 몇 번이나 저희 집에 빨래 하러 오시는 거에요...오늘만 세 번째 오셨어요...

원하시면 이걸 가져가시고 제가 새로 살게요.'

멍2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당신 집이 좁다며 기존의 다른 짐들도 저희 집 구석구석에 넣어 두신 어머님이시기에 말해 봐야 개선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이 월풀이를 사용하면서 가장 크게 불편했던 점은 이 세탁기가 오래되었다는 점이 아닙니다.

이 세탁기는 제가 16년 전 한국에서 처음 사용했던 LG 세탁기보다도 훨씬 더 아날로그적이란 점이었습니다.

수동으로 물의 온도와 압력, 속도 등 모든 것을 작동해야 하는 이 구형 세탁기에는 숫자 외에는 어떠한 설명도 쓰여있지 않아, 이민 전에 최신식 세탁기를 사용하다 이민 왔던 저로서는 도무지 이 숫자들에 적응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모든 기술 분야에서 빠르고 정확한 것을 추구하던 한국의 '자동식'(오토매틱 형) 세탁기들은 전원을 켜고 버튼만 한번 '디링' 원하는 메뉴에 맞추어 돌려주면(그것도 친절하게 빨래를 하고자 하는 목적이 잘 적혀있는) 간편하게 세탁을 알아서 끝내주는데, '수동식' 세탁기들은 숫자만으로 최소 세 가지 이상의 버튼을 돌려 맞추어야 빨래가 가능하기 때문에 한국인인 저로서는 이런 세탁기가 불편하고 도대체 어떤 온도와 압력으로 맞추는 것이 좋은지 알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한국의 '자동식'세탁기에도 온도와 압력 등을 맞추는 버튼이 따로 있고 이것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세탁에 관한 큰 지식이 없었던 저로서는 그냥 '디링' 소리가 나는 자동 버튼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며칠 전 쓴 대로 번개에 세탁기 전선이 타 들어갔고...

저희 집 '월풀이'는 그 수명을 다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새 세탁기를 사기 위해 돈이 들겠다는 걱정은 되지 않았습니다. 저도 쓸데 없는 돈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것 같아 세탁기를 사려고 마련해 둔 여분의 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님은 월풀이를 끌어 안고 "아이구...드디어 네가 수명을 다 했냐?" 안타까워하셨지만,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던 것입니다...

'ㅎㅎㅎ음하하하...드디어, 나는 자동식 세탁기를 사러 갈 것이다!'

기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시어머님 역시 새 세탁기 구매에 적극 당신 취향을 반영하고 싶어하셨고, 저희는 함께 시내의 전자제품 매장 중 가장 여러 품목을 보유하고 있는 초볼로스 ΚΩΤΣΟΒΟΛΟΣ 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로도스의 고초볼로스입니다.

그곳에는 세탁기만 한 층의 반을 진열할 만큼 다양한 용량, 종류, 상표의 세탁기가 진열되어 있었는데요.

한국보다는 일반적으로 더 적은 용량(kg)을 사용하는 유럽인들의 취향에 맞추어 10kg 세탁기보다는 7~8kg 세탁기 종류가 더 많았습니다.

독일, 미국, 한국 등 다양한 회사의 다양한 브랜드의 세탁기 중에 어떤 것을 살까 꼼꼼히 기능을 따져보는데, 사실 제 마음은 가기 전부터 오랫동안 익숙했었고 잔 고장이 없었던 한국의 LG 세탁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놀란 사실은 그 많은 종류의 2013년 2014년 형 새 모델인 세탁기 중에도, 수동식 아날로그 세탁기 형태가 정말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는 스마트 폰이나 첨단 휴대기기를 좋아하는 젊은 층과 아날로그 정서를 그대로 고수하길 원하는 기성 세대가 공존하는 유럽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 했는데요.

마치 여전히 유럽에서는 오토매틱 자동식 기어 자동차보다 스틱식 수동 기어 자동차를 사용하는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LG와 SAMSUNG은 그리스의 TV 시장 뿐만 아니라 세탁기 시장에서도 호평 받는 고급형 제품에 속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실제 가격 면에서도 진열 제품 중 독일 브랜드 하나를 제외하고 LG가 가장 비싼 편이었고, SAMSUNG도 평균 가격에 비해 웃도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품이 워낙 뛰어나고 잔 고장이 없다는 인식이 강해, 품질 대비 적정한 가격이 책정되었다는 인식이 강한 듯 했습니다.

남편 매니저 씨 집안에는 그리스 다른 도시에서 대형 가전제품 매장을 갖고 있는 친척이 있습니다.

그 분에게 그리스에서의 한국 가전제품의 선호도와 판매량을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분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한국 가전제품은 그리스 시장에서 70% 정도를 점유하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 같아. 선호도가 그 만큼 높다는 뜻이지. 그렇지만 요즘 그리스 경기가 어려워지며 저가의 그리스 국내 브랜드나 대만, 독일, 미국 등의 저가 기획 상품들이 그 판도를 달라지게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야."

 

 

저는 가격이 좀 비싼 군에 속하더라도 자동식에 잔 고장이 적은 LG 세탁기를 사고 싶었고, 그 앞에서 특유의 버튼을 '디링'거리며 돌려보고 있었는데요. 그리스어로 쓰여진 기능들은 자세히 보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제가 쓰던 것과 상당히 비슷한데 좀 더 발전된 형태라 더 둘러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때, 더 저가형의 세탁기를 둘러보시던 어머님께서는 제 옆에 다가오셨고 저에게 의외로 이런 말을 남기셨습니다.

"너, 이걸 꼭 사야겠니?"

"네, 어머님은 싫으세요?"

"싫긴. 저기 보쉬나 캔디나 월풀보다 이게 비싸긴 해도 더 좋다는 걸 나도 알아."

"어머 어떻게 아세요?"

"사실은...우리 호텔에 올 여름에 세탁실 대형 세탁기들을 다 바꾸었거든. 근데 사장이 모두 LG 걸로 바꾸었어. 그래서 세탁실 파트의 직원들이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 진짜 신기하더라. 완전 편하던 걸. 그리고 내가 진짜 반한 게 뭔 줄 아니? 바로 '디링'하고 버튼을 돌릴 때 그 소리와 감각이 다른 세탁기보다 훨씬 좋다는 거야. 뭐랄까. 부드럽게 돌아가는 것 같으면서도 탁 하고 정확하게 걸리는 기분이랄까?

하트3사실 다른 세탁기들은 그런 감이 별로 없거든. 여기 보렴. 다른 걸 한번 돌려 봐."

 

저는 어머님 말씀대로 다른 나라 브랜드 세탁기의 버튼들을 돌려보니, 정말로 한국 세탁기가 주는 그런 버튼을 돌려 설정하는 감각과는 아주 다른 투박한 느낌이 들었고, 소리가 나지 않는 종류도 많았습니다.

 

어머님의 '한국 세탁기에 사실은 이미 반했다'는 때 아닌 고백에, 제 세탁기 구입은 손쉽게 이루어 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겨울 세일 인기 품목인 LG 세탁기 중, 세일에 해당되는 모델이 품절이 되어 1주일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뭐 1주일 손빨래 하고 30만원을 아낄 수 있었기에 손목 아픈 것을 마다하고 그 모델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어로 쓰여진 LG 세탁기 버튼이 생소하시지요?

저는 오늘도 이 '디링'소리와 특유의 돌리는 감각을 느끼며 행복하게 세탁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부쩍 제 세탁기를 사용하는 빈도가 높아지신 저희 어머님도 조만간 새 세탁기를 하나 사실 조심이 보이고 있어, 분명 한국 세탁기를 고르시겠구나 짐작할 수 있겠네요.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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