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살 때도 연말이면, 1년 동안 일정을 적어둔 다이어리를 들여다보며 올해는 뭘 잘 했지, 뭘 감사할 일이 있었지, 계획했는데 못 이룬 일은 뭐지, 좋았던 기억은 있나, 난 작년 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나 등등 생각이 많아지곤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에 이민 온 후 첫 번째 연말을 맞았을 때, 그 연말증후군은 한국에 있을 때와 비할 바가 안 되게 심하게 나타났습니다.
아직은 많이 낯선 시댁가족들은 모두 서로를 챙기는 것 같았고, 연말 연시 파티가 이어질 때마다 시어머님은 당신 딸인 시누이 앞으로 음식접시를 밀어놓곤 하셨는데, 어떤 날은 정말 정신 없이 딸을 위하시느라 제 앞에 놓인 접시까지 밀어 옮기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민 후 첫 번째 연말은, 한국과 한국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매일 눈물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보냈을 만큼 쉽지 않게 겨우 지나갔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이런 연말증후군은 점점 호전되는 듯 했고, 연말 파티를 시댁가족들과만 한다 해도, 저는 더 이상 고아 같은 기분을 느끼진 않게 되었는데요. 가족들과 가까워지고 좋은 일 궂은 일을 함께 겪어 나가며 저도 이제 이 가족 안에 들어온 기분이 들어서 그럴 것이고, 그렇게 낯설던 그리스 음식도 이젠 적응이 되어서일 것이고, 연말이면 매일 반복되는 긴 파티에 앉아 있어도 지루함 없이 함께 웃고 수다 떨 수 있을 만큼은 그리스어를 사용할 수 있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말증후군이 아예 없어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제 부모님과 동생들이 멀리 있는 것만은 사실이니까요. 이런 연말 연시라도 함께 따뜻한 밥 한끼 모여 먹기 어려운 상황을 선택해서 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아침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서,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희 집 화분이 여러 개 깨져있었고, 마당 테이블 위 장식품들이 바닥에 다 떨어져 있었고, 테이블 보는 사라져 없어졌고, 옆집 나무는 부러져 쓰러져 있었으니까요.
강풍이구나. 싶어 조심조심 운전해 등교를 시키고 일을 하러 가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살 때의 겨울 어느 날 생각이 났습니다.
저희 집 근처 인심 좋은 떡볶이 아줌마 가게를 들러 떡볶이 한 봉지에 김말이 튀김을 사서 들고 집에 와 검은 봉지를 풀어 헤쳐 떡볶이를 한 바탕 꺼내 놓고 너무 맵다 호호 불면서도 우유와 함께 열심히 먹고 나면, 어쩐지 스트레스가 휙 날아가는 기분.
그런데 여기에선 그렇게 손쉽게 떡볶이 한 봉지를 사 먹을 수도 없구나 싶었고, 시내에도 나무가 부러지고 큰 화분이 깨져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은 더 가라앉았습니다.
슈퍼마켓 주차장의 나무, 거리의 입간판, 화분들도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뙇!
그 강풍에도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바다 바로 길 건너 노천카페였는데요.
"대단하다…!"
그들은 진정 날씨에 구애 받지 않고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 같아 보였습니다.
오전 업무를 마치고 집에 잠깐 들렀는데, 시어머님께서 저를 보자마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 오늘 빨래를 몇 통을 돌렸는지 아니? 바람이 엄청나서 빨래가 진짜 잘 마른다, 얘. 정말 좋다."
헉. 이런 날 빨래가 잘 마른다고 열심히 빨래를 하시다니.. 빨래 안 날아가게 정말 주의해야 하는 날인데. 우리 시어머님도 정말 대단하시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보지 않은 길을 궁금해 하고, 나와 다른 길에 서 있는 누군가를 부러워한다는 것을요.
그리고 내가 서 있는 길이 힘이 들면 이미 선택된 길로 들어서기 전의 나 자신을 질투한다는 것을요.
연말이라고 아무리 마음이 뒤숭숭한들, 저는 어차피 현재 한국에 갈 수 없는 상황이고, 그리스로의 이민을 선택하기 전인 그 좀 안정되고 살만했던 한국에서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요.
그렇다면 난, 지금 현재 한국에 있는 누군가를 부러워하거나, 그리스 이민 전의 내 상황을 그리워하며 이 연말을 우울하게 보낼 게 아니라, 거센 바람에도 노천카페에 앉아 자신의 현재의 삶을 충분히 즐거워하는 사람들이나, 강풍이 분다고 신나게 빨래를 하는 우리 어머님처럼, 오늘을 즐겁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저는 아크로폴리스가 있는 몬테스미스 도로로 차를 몰고 갔습니다.
이 곳은 제가 하루에도 두 번 이상은 운전해서 지나다니는 해안도로입니다.
시내 안쪽 도로가 막힐 때가 많아 우회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6월 동생 가족이 다녀간 이후로 단 한번도 이 몬테스미스에 정차해 바다를 쳐다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크로폴리스는 여름 내내 관광버스 타고 몰려오는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곳이라, 최근 1년 사이 더욱 빨리 지나치기만 했던 장소였습니다.
저는 몬테스미스 해안도로에 차를 세우고 바다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바람이 정말 차고 거세어 머리가 산발이 되고 얼굴이 따가울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출렁이는 바다를 보고, 저 멀리 눈 덮인 터키 땅도 바라보았습니다.
길을 건너 아크로폴리스로 다가갔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나무도 보이고, 지중해성 기후의 겨울답게 푸르른 잔디가 강풍에 넘실 넘실 춤을 췄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나무입니다.
원형 경기장도 내려다보고, 저 멀리 집들도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랬습니다. 제가 선택해서 온 그리스의 가장 좋은 것들을, 이곳 생활이 버겁고 정신 없다고 그냥 하찮게 여기며 감사함 없이 살고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처음 볼 땐 그렇게 감탄했던 것들을, 이젠 그냥 제가 다니는 도로의 배경 정도로 여겨왔던 것입니다.
마치 한국에 살 때 매일 한강을 가로지르면서도 한강이 얼마나 큰 혜택인지 감흥이 없었던 것처럼요.
매일 먹던 김치가 큰 감동을 주지 못했던 것처럼요.
내가 선택하지 못한 것을 그리워할 게 아니라, 이미 선택한 것들을 즐기자 싶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움 풍경 속에서, 그러나 강풍에 산발이 된 머리로, 전 제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서이지요.
찍는 장소에 따라 햇볕 때문에 머리 색이 달라 보였습니다.
오후에 학원가는 길에, 산발머리지만 나름 사연 있는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딸아이가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엄마. 엄마는 춤 출 때 꼭 권투 하는 사람처럼 추잖아. 혹시...몬테스미스에서 이 머리로 모자를 쓰고 기분 좋다고 권투 하는 춤 춘 건 아니겠지...?"
" 내, 내가 언제 권투 하는 사람처럼 춤 춘다 그래? 그리고 언제 춤을 췄다고?
"운전하다 라디오에서 신나는 음악 나오면 어깨를 이렇게 들썩거리며 꼭 권투선수처럼 춤을 추는데...기분 나빴던 거야? 그럼 미안해요..."
"그, 그건 운전하느라 그렇게 밖에 표현이 안 돼서 그런 거야….ㅠㅠ"
딸아이를 데려다 주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이번엔 매니저 씨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매니저 씨는 제게 사진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돌직구를 날립니다.
"큰 곰 같아."
"
"뭐라고? 마리아나는 나더러 권투 하는 거냐고 했는데…뭐야. 둘이 짠 거야? 이거 나름 사연 있는 사진이라고..."
"응. 그렇다면 권투 하는 곰 같아."
"두꺼운 옷에 달린 모자가 털이 많고 내 머리가 산발이라 그렇지 곰은 아니다, 뭐... 뭐... 뭐...."
"곰이구만 뭐!"
저는... 그렇게 졸지에 '권투 하는 곰'이 되었습니다.
시베리안 허스키라고 차라리 해주지...
뭐라고요? 시베리안 허스키에게 모욕이라고요?
엉엉..독자님들까지 나를 곰이라고 하시는 거에요??
그래도..권투하는 곰이어도 좋으니, 이제 가끔 이렇게 짬을 내어 좋은 장소에 가서 바람도 쐬고 천천히 산책도 하며 오늘을 즐겁게 살면서, 그렇게 연말증후군을 극복해야겠다고 결심하는 하루였습니다.
아, 마지막으로 마리아나가 제게 권투 하는 춤을 춘다던 음악을 소개합니다.
지난 10월, 그리스와 유럽에 때늦게 히트해서 라디오만 틀면 흘러나왔던 Capital Cities의 Safe and Sound 입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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