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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한국

외국 사돈에게 엉뚱한 사람이 된 한국 아버지의 변(辨)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11. 15.

 

 

 

그리스에서의 결혼식을 앞 두고 부모님께서 그리스에 들어오셨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엄마는 시부모님을 그 전에 직접 만난 적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화상통화로만 이 그리스 사돈댁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처음 보는 그리스 사돈댁 가족들은 그리스인들 예의 반가움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아버지를 안아주었고, 환영의 바비큐 파티를 하면서 내내 아버지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 성함이 철수라고 가정한다면, "철수! 이것 먹어봐요!" "철수, 그리스 와보니 좋아요?" 뭐 이런 식이였지요.

ㅎㅎㅎ

평소 입맛이 까다로운 아버지는 그런 그리스인들의 분위기와 음식을 의외로 즐기셨고, 결혼식 전후로 그리스에 머무는 동안 많은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셨습니다.

결혼식을 정신 없이 치르고, 저는 먼 길을 와준 친구들 가족들과 부모님께 하나라도 더 좋은 곳을 보여드리려고 숨돌릴 틈 없이 바빴는데요.

어느 날, 아버지께서는 저희 부부의 예물을 만들어준 사위 매니저 씨의 외삼촌께 꼭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외삼촌 가족을 결혼식에서 만나 인사를 하시긴 했지만 축의금을 넉넉하게 하셨다는 이야길 들으셔서 고마운 마음에 아마 더 인사를 따로 하고 싶으신 것 같았기에, 저는 부모님을 모시고 외삼촌 가게에 들렀습니다.

 

 

외삼촌 부부께서는 제 부모님을 무척 반가워하셨는데요.

한참 성수기라 매장을 비울 수가 없어 죄송하다며 커피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커피 프라뻬를 한 두 모금 시원하게 들이키시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매장 안을 왔다 갔다 하시며 꼭 물건을 살 손님처럼 자세히 들여다보시기 시작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몹시 당황해서, "아빠, 여기서 뭐 사시려고요? 여긴 독특하게 세공된 제품이 많아서 가격이 좀 있는데…." 라고 급하게 한국어로 말을 뱉었는데요. 즉흥적으로 물건을 사기엔 좀 고급제품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평소 아버지가 겨울에 운동 삼아 어쩌다 스키를 타러 가셔도 기름값 아깝다며 경로우대권을 이용해 그 먼 거리를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이동하실 만큼, 절약이 몸에 베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저로서는 말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저와 엄마, 함께 간 제 친구 가족, 외삼촌 부부까지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아버지의 다음 말이었습니다.

"어, 저기. 올리브나무야. 너 내 말 좀 전달해라." 라고 시작된 아버지의 말은 이랬습니다.

"흠. 흠. 저기 뭐냐. 제가 좀 예쁜 반지를 하나 사고 싶네요! 그 뭐냐. 내가 반지를 좋아하는데, 결혼반지도 이제 오래되어서 잘 안 끼고, 몇 년 전에 집사람과 커플링을 맞췄는데, 그것도 이 사람이 집안 일 할 때 불편하다고 잘 안 끼고 다녀서 나 혼자만 여태 끼고 다니고 있는데, 이 참에 나 혼자 낄 수 있는 결혼반지 같은 좀 두껍고 멋진 디자인의 반지를 새로 맞춰야겠어요. 외삼촌이 좀 골라주시오."

헉

외삼촌은 그 말에 정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는데요.

그게...결혼반지에 대해 한국 보다는 좀 더 의미를 부여하는 그리스 문화에서, 나이 지긋한 남자가 아내와 함께 맞추는 것이 아닌 자기 혼자만을 위해 결혼반지 스타일의 반지를 사려 한다는 게 정말 이상해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아내가 버젓이 앞에 있는데도 '당신도 사줄 테니 함께 끼고 다니자'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라, 외삼촌 입장에서는 제 아버지가 정말 이상해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말에 당황한 것은 엄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엄만 외삼촌의 놀란 표정을 보시더니 창피함에 얼굴까지 벌개지셔서 아버지 옆구리를 쿡쿡 치며 한국어로 "당신 왜 그래." 라고 억지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를 말리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왜들 호들갑이냐는 듯 당당하게 반지를 껴 보기 시작하셨고, 외삼촌도 그런 아버지께 두꺼운 커플링 형태의 반지들을 보여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지를 껴 보시며 말씀이라도 하지 마시지.. 아버지는 내내 "야~~~, 이런 디자인은 한국에서 별로 본 적이 없는 거에요! 제가 동대문 쪽에서 사업을 오래해서 종로에서 금은방 하는 친구들도 좀 있었는데, 이런 독특한 디자인은 여기서만 구할 수 있는 건가 보네요. 야~~~외삼촌 정말 대단하시네!"라고 말씀하셨고, "야! 너 내 말 제대로 통역한 거야?" 라는 말도 빠짐 없이 반복하시는 평소답지 않은 주책 맞음을 선보이셨습니다.

즐거워

참다 못한 엄마는 결국 제 친구 가족을 데리고 가게 밖으로 나가셨고, 아버지 말을 통역해야 하는 저는 엄마를 따라 나가지 못하고 쇼윈도우 너머로 엄마가 제 친구에게 뭐라고 뭐라고 하는 입 모양만 관찰해야 했는데요. 제가 입 모양을 읽어내는 특수 능력자가 아니더라도 엄마의 표정만으로도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안습

결국, 아버지께서는 그냥 여행길에 사기엔 정말 비싼 그런 반지를 구입하셨고, 포장해주겠다는 것을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끼고 가겠다며 손가락에 떡하니 자랑스럽게 끼고 가게를 나오셨습니다.

엄마는 대충 외삼촌께 인사를 한 후, 차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가게가 점점 멀어지자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하셨는데요.

"당신 정말 주책이다. 왜 그걸 사는 거야? 응? 당신이 반지가 없는 것도 아니고, 왜 필요하지도 않는 비싼 것을 그렇게 사고, 또 혼자만 사서 껴서 나까지 창피하게 만드는데. 저 분들이 우리를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하겠어! 반지가 예쁜 디자인이긴 하지만, 그렇게 비싼 걸 막 사다니 난 정말 당신이 한번씩 이럴 때 보면 이해가 안 돼! 평소에 돈 아깝다고 못 하는 게 그렇게 많으면서!"

흥5

그런데...아버지의 대답은 뜻 밖에도 이랬습니다.

"여보. 내가 반지를 아무리 좋아한다고, 아무리 디자인이 멋지다고 내 성격에 이 비싼 걸 여기서 그냥 사고 싶겠어?"

엄마는 황당하다는 듯이 걸음을 멈추고 아버지께 반문했는데요.

"그럼 왜 산 거야? 도대체!"

 

저는 다음 아버지의 대답에 할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는... 올리브나무가 이렇게 문화도 다르고 말도 다른 낯선 나라 사람들을 시댁 식구로 맞이하는데, 내가 말도 잘 안 통하는데 사돈들에게 뭐라고 좋은 얘기를 할 수도 없고, 그냥 올리브나무 체면을 좀 살려주고 싶었다고. 저 외삼촌이 내가 비싼 반지 산 거, 얘 시부모한테도 말 할 것 아니야. 이쪽 사람들도 한국에 나와 본 적도 없고 우리가 어떤 집안인지도 모를 텐데, 사돈 가족 가게에서 비싼 반지도 사주네, 좋게 생각하지 않겠어?"

"...그럼, 그렇다고 진작 나한테도 좀 알려주면 좋잖아. 근데 이왕 딸 체면 세워주려고 사는 거면 내 것도 사지, 왜 당신 것만 샀어?"

"당신 거는 올리브나무가 낼 모래 당신 생일 선물로 비싼 귀걸이 목걸이 세트, 여기서 샀다던데! 그리고 반지 하나 사는 것도 돈이 너무 비싸서 솔직히 진짜 아까웠다고…"

아버지의 말에 제 깜짝 선물은 엄마에게 들통이 났고, 제가 엄마 선물을 샀다는 말에 그만 기분이 풀리신 엄마와, 반지 낀 두꺼운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이야~ 정말 멋지네." 라고 연신 좋아하시는 아버지와, 그 모든 광경을 눈이 동그랗게 쳐다보는 제 친구 가족들을 바리바리 챙겨 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어이 없고 아버지의 주책 맞은 표정에 웃음이 팍 터지지만, 결국 아버지의 의도대로 외삼촌으로부터 아버지의 반지 구매에 대한 얘길 전해 들으신 시부모님께서 "아이고,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굳이 물건을 팔아 주신다니." 라고 고마워하시는 말을 들은 후로는 이상하게도 허공에 손을 쫙 펴고 반지를 보며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두텁고 울퉁불퉁한 손가락이, 번쩍이던 반지 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 두텁고 울퉁불퉁한 손은, 수십 년 일터에서 고생하시며 저희를 길러내고 시집 보낸 고마운 손이니까요.

 

 

 

여러분 따뜻한 금요일 되세요!

좋은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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