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속의 한국

이민 1.5세 딸아이의 요상한 끝말잇기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10. 31.

 

 

유치원 때 그리스에 왔으니 사실 이민2세나 마찬가지일 수도 있지만, 태어나 한국에 몇 년 동안 딸아이는, 일하는 엄마 때문에 15개월 무렵부터 어린이집 혹은 유치원 종일반을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전화위복이라고 그런 계기로 한국어와 한글의 기본을 닦았습니다.

그리스어, 한국어, 영어를 사용하며 생활하는 딸아이는 감사하게도 한국어 삼행시나 끝말잇기 등의 놀이를 좋아합니다.

3.6.9 게임을 한국어 제자 갈리오삐에게 가르치려다 한국어도 아직은 서툰 그녀를 혼돈의 세계에 빠뜨린 이후로는 이젠 갈리오삐, 디미트라, 이로 아주머님을 만나면 자꾸 한국어 삼행시 놀이를 하자고 해서 또 당황하게 만들곤 하는데요.

아무리 그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어도, 아직은 딸아이가 알고 있는 생활 단어 양을 따라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말 가족 파티 준비할 때 김밥과 잡채를 넉넉히 해 두었는데, 저녁에 디미트라 가족에게 좀 갖다 주니 정말 순식간에 접시를 싹싹 비웠습니다. 그저 음식 나눠주고 잠시만 앉았다가 돌아오려던 계획과 달리, 그날 우리는 세 시간 넘게 한국 음악을 함께 듣고, 이로 아주머님과 디미트라가 '장기하와 얼굴들' 노래에 맞춰 춤추는 것도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춤추는 이로 아주머님.

사실 동영상을 찍었는데 제 웃음소리가 정말 크게 들어가서 차마 공개하지 못하고 캡처로 대신해요.--;

 

 

그날도 딸아이는 디미트라와 갈리오삐에게 한국어 삼행시 놀이를 하자고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박명수가 삼행시의 달인이라는 사실 정도쯤은 한국 예능을 통해 기본으로 알고 있는 갈리오삐는 제법 삼행시를 만들 수 있었는데요.

차례가 되어 딸아이가 삼행시를 짓는 것을 보며 저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습니다.

딸아이가 만든 삼행시는 이랬습니다.

시제 1: 박 명 수

박! 박박 긁어 먹었어요.

명! 명태를!

수! 수 백 마리는 먹었어요.

헉

 

시제2: 떡볶이

떡! 떡볶이를 먹었어요.

볶! 볶아서, 많이 볶아서 먹었어요.

이! 이빨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먹었어요.

 

시제3 : 알리끼 (딸아이의 단짝 친구로 지난번 뽁뽁이를 함께 터뜨리던 아이입니다.^^)

알! 알코올을 마시면 안 돼요! 왜냐하면

리! 리본을 달고

끼! 끼 부릴 수 있어요.

헉

저는 깜짝 놀라서 여기서 그만!을 외쳤고, 한국어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끼 부린다는 말도대체 이 녀석이 어디서 들은 것인지 추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딸아이는 추궁하는 저에게 울먹이며 "엄마...나도 몰라 무슨 뜻인지. 그냥 같이 개콘에서 봤잖아…"

 

아...미안...그게 네 나이보다 제한 연령이 높은 프로라는 것을 잊고,

재미있으니까 자꾸만 같이 보는구나

OTL엄마가 잘못했다...

 

그런데 계속 되는 딸아이의 삼행시를 듣다 보니, 어떤 단어로 이행시, 삼행시, 사행시를 해도 대부분 먹는 얘기로 귀결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제4.:가방

가! 가서 먹어도 또 먹고 싶은 맛이에요.

방! 방에서 혼자 먹을래요.

 

참, 먹는 것을 좋아하는 딸아이 답습니다. 

영화

결국 삼행시 그만하자며, 끝말잇기로 놀이를 전환했는데 딸아이는 여기서 결정적으로, 자주 안 쓰던 한국 단어를 가물가물 기억하는 이민생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제 차례에 저는 장갑 이란 단어를 말했는데요.

이어서 으로 시작되는 단어를 말해야 하는 딸아이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갑잔치!"

잉? 갑잔치? 그게 뭐야? 너 설마 어디 한국 예능에서 갑과 을의 관계 뭐 이런 말도 들어 본거야??

아니, 엄마 나이가 60이 되면 하는 잔치!

헉. 환갑잔치 말이야???

그게….'환갑잔치'였어? 난….'갑잔치' 인줄 알았는데….

 

갑잔치에 빵 터진 저는 배를 움켜쥐고 깔깔거리며 웃었고, 딸아이는 본인이 여태까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멍한 얼굴이었고, 제가 웃는 이유를 모르는 한국어 제자들은 딸아이와 저를 번갈아 눈만 꿈뻑거리며 쳐다보았답니다.

여러분. 갑잔치(갑들이 하는 잔치)에 휘둘리지 않는. 즐거운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

 

 

관련글

2013/02/02 - [세계속의 한국] - 3개국어를 알아들어야 하는 딸아이의 유머돋는 한국어 실수.

2013/04/30 - [재미있는 그리스어] - 그리스에 있는 '최봉재'라는 간판에 흥분한 딸아이

2013/05/07 - [소통과 독백] - 나 때문에 이상한 대회에 나가려는 딸아이의 외국인 친구

2013/09/17 - [소통과 독백] - 배고픈 걸 못 참는 딸아이를 깜짝 놀라게 한 우편물

2013/10/17 - [재미있는 그리스어] - 한국어와 그리스어의 합성신조어를 사용하는 그리스인들

2013/05/23 - [세계속의 한국] - 딸아이가 말하는 한국 노래 '가리킬게'가 뭔지?

2013/06/04 - [소통과 독백] - 피카소 같다는 말에 딸이 울음을 터뜨린 재밌는 이유

2013/04/15 - [세계속의 한국] - 그리스인들이 가장 질색하는 한국의 놀이